오래된 일기장

이제와... 미안해

9할은 바람 2010. 6. 14. 18:06

지난 주 토요일... 오랜만의 외출로 한껏 멋을 부리고... 친구와 만나 수다를 떨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경주에는 유난히 고즈넉하고 소담한 골목길이 많아... 번잡한 큰길에서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아도 고개를 돌리면... 쉽게 그런길에 들어 서곤 한다...
내 국민학교 등교길...
친구들과... 혹은 동생 손을 잡고서... 학교로 또는 집으로 걷던 그길...
참으로 오랜만의 친구를 만난 듯... 그렇게 흥얼흥얼...
한참을 돌아서 걷는데... 저 골목길 귀퉁이... 한여름... 보기에도 더워보이는 두꺼운 체육복... 촌스러운 파란색에 솔기로 난 하얀 줄무늬... 아무렇게나 자른 듯한 단발 머리...
가물가물 촛점을 잡으려는 듯 멍한 시선... 다물어 지지 않는 입...
정확히 14년전... 기억속 내 친구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순덕이... 정덕이... 섣불리 부를 수 없을 만큼... 내 기억속엔 그 아이의 이름 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나 보다...
저 멀리서 걸어와... 나를 스쳐 지날때 까지... 어찌나 그 시간이 길게 느껴 지던지...
...
국민학교 4학년 ...
우리반으로 전학온 아이... (그냥 아이라 부름에는 뭔가 석연치 않아 순덕이라 부르기로 하자) ... 순덕이는 첫눈에도 미숙해 보였고... 많이 착해 보였었다...
그랬다... 저런 아이... 그러니까 갓 전학을 와서 학교에 적응이 필요한 아이는 그 당시... 언제나 내 옆자리 였다...
그리곤 늘 내게... 정아는 부반장이고 맘도 착하니까 잘 돌봐 줄 수 있을꺼야... 하시며 짐(?)을 떠 맡기 시던 선생님...
학급에 중요한 일은 반장에게 맡기면서... 늘 이런 시시한 일만 내게 맡기는 선생님이 미웠고... 자존심 빼면 시체였던 내게... 순덕이는 말 그대로 눈엣 가시였다...
등교와 하교을 같이 해야 했고... 점심을 같이 먹어야 했고... 체육시간 미술시간 자연시간엔 늘 옆에서 챙겨줘야 했다
선생님과 아이들에겐 늘 천사처럼 웃어야 했고... 순덕이를 다독여 줘야 했던게... 그때 어린 마음에... 많은 짐이 됐나 부다...
녀석을 몰래 몰래 꼬집기도 하고... 내 말대로 따라와 주지 않을땐 꿀밤도 주고... 못된 말로 울리기도 했었었다...
그렇게 2년여... 같은 반... 가을이었지 싶다
녀석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순간 철딱서니 없는 생각이 들었고... 그 아이를 데리고 몇시간을 걸어 생경 낯선 동네에 도착해선... 녀석을 그곳에 두고 오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 노을은 어찌나 이쁘고... 또 그하늘에 떠 다니는 고추잠자리들은 어찌나 이쁘던지...
하지만... 12살 먹은 아이가 저지른 일 치고는 너무 무서운 일이었기에... 난 그대로 집엘 들어가지 못하고선 배회 하기 시작했다
저녁 8시... 긴긴 여름해가 지고서... 어둑어둑 남빛으로 바뀔때... 동네에서 순덕이 부모님을 만났다...
걱정이 가득 들어선... 그 분들의 낯빛을 보고... 내가 큰일을 저질렀구나 싶었다...
순덕이의 행방을 묻는 그들에게...  태연하게도... ' 저도 지금 찾고 있어요... 잠깐 문방구에 들렀었는데... 그새 없어졌네요... 어떻해요' 하며... 깜찍하게도 파르르 경련까지 떨어 보였었다
그렇게 한시간여 찾아 다녔을까?  학교 근처에서 어슬렁 어슬렁 걷고 있는 녀석을 찾게 되었다...
모든게 들통이 난 마당에... 난 정말 숨고 싶었다...
근데.. 그 녀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씨익 웃는다
그리고... 제 부모님 보다 먼저... 내 손을 불쑥 잡고는 헝~ 하고 웃어 보인다...
아... 그 아이에게... 그 모자라게만 보이는 아이에게... 난 지고 말았다
바보야... 너한테 그렇게 못됐게 굴었는데... 널 그렇게 버렸는데도... 넌 내게 이렇게 웃어 보여 주는구나... 바보야...
그렇게 12살... 난 그때부터... 의심없이 사람들을 믿기 시작했었나 보다...
그래... 그때 그아이... 순덕이...
그 아이가 지금 나를 스치려 하고 있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시선들... 다물어 지지 않는 입... 두손을 두꺼운 체육복 바지에 찔러 넣고선... 파아란 고무 딸따리를 엇박자로 끌어가며... 지금 그렇게 내 옆을 스쳐가는 아이...
순덕아~ 하고선... 정말 불러보고 싶었었는데... 마음만 앞섰고...
용기 없게도 그냥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말았다
근데.. 녀석... 날 알아보기나 한걸까?  잠깐 날 보고선 그 알듯 모를듯한 웃음을 보내고선... 다시 촛점을 흐리고 만다
...
순덕아... (이 이름이 맞길...)
이제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내가 그때 많이 어리고 모자라서... 널 친구처럼 대해 주지 못했나봐
어쩜... 그땐.. 니가 나보다 더 어른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미안해... 미안해...
...
집으로 돌아와 쨘~한 마음을 추스리며 거울을 보는데...
하늘색 눈화장... 분홍빛 립스틱... 한껏 부풀린 퍼머머리...
어쩜 그렇게 천해 보이고... 늙어 보일 수가  없더라...
한편으론... 녀석... 너도 꾸미면 참 이쁠텐데... 참 여자다와 보일텐데... 싶어 또 미안해 지더라...
...
그 골목길...
내 기억속 미안했던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던 날...
마냥 12살이 된듯... 집에 돌아와... 초인종을 누를 생각도 안들고선... 이렇게 외칠 뻔 했다
엄마~ 학교 다녀 왔어요~

 

2002/07/10